“평범한 재료와 비슷한 건축 요소라도
다르게 쓰이면 특별하다.
서울 구도심 한복판,
새로 지어진 협소주택은 동네에
이질감없이 새로운 표정을 입히고 있다.”
어린 아이와 젊은 부부로 이루어진 가족은 단조로운 경험으로 점철된 아파트 생활을 벗어나 협소하더라도 독립된 집에서의 삶을 꿈꿔왔다. 젊은 시절을 보낸 후암동을 향한 향수와 그리움을 키우는 아내는 작더라도 풍요로운 삶이 가능한 주택을 기대했다. 아파트에서는 영유할 수 없는, 단독주택이 지니는 본질적인 가치는 무엇일까.
후암동에 스며들다
후암동 전경과 작은집. 동네를 깊이 이해하고 앞으로의 변화에 의연하게 대응하며 서있다.
아파트의 각 주호가 주변 지역으로부터 ‘단지'라는 경계로 단절되어 있음에 비해 단독주택은 주변 환경과 직.간접적으로 닿아 연결되는 다양한 방식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집 주변과 동네를 다층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특히, 후암동의 꼬불꼬불한 골목길, 다양한 모습의 계단과 경사로 등 입체적인 도시를 직접 밟고 딛는 경험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장소에 대한 인식이 자라날 수 있다. 단독주택 내외부에서 얻어지는 일련의 경험들은 삶을 다층적으로 기억하게 하고 가족이 함께한 날들을 깊이 담아두게 할 것이다.
작은집 미리보기
보편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단독주택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드러내는 것이 설계의 주요 목표이자 지향점이 됐다. 층간소음 걱정으로부터의 해방은 아이를 둔 부모에게 결코 작은 매력이 아닐 것이다. 똑같은 구조의 집이 수평적으로 집적한 아파트와 대조적으로, 독립된 단일 공간의 수직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것 역시 중요한 설계 과제였다.
주택은 방과 방이 위아래로 놓여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써 집 안에서 가족 구성원간 다양한 방법의 소통과 교감이 가능하다. 또한, 집이 주변 환경 즉 ‘동네'로부터 물리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것 역시 단독주택이 지니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이다.
정면은 의미와 역할이 다른 아홉 개의 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이 땅을 만나는 1층과 하늘에 닿는 5층을 구별하기 위해 종류나 색이 다른 재료를 적용했다.
도란도란 가족실
가장 높고 큰 부피의 핵심 공간. 가족실은 층을 오르내리는 가족의 모습이 보이고, 작은 이야기 소리가 크게 울려퍼지는 곳이다.
남동쪽으로 열린 네 개의 창으로 빛과 바람이 들어온다.
가족실에는 다양한 공간이 닿아 있다. 상대적으로 큰 체적이 지니는 의미 이상으로, 가족의 다양한 일상이 모이고 흩어진다.
가족실에서 바라본 계단실과 서비스 공간. 계단실 우측에는 샤워실과 화장실이 각각 상부층 하부층에 위치한다.
3층 다목적실
2층 가족실과 천장을 함께 쓰는 3층 다목적실. 남동쪽의 높고 환한 창을 멀리서 바라본다. 집의 각 내부공간과 연결된 외부 공간은 주변의 도시 조직과 시각적, 공간적으로 이어져 여러 방향에서 펼쳐지는 도시의 모습으로 집 안으로 들여온다.
작은 집, 높은 방 ㅣ 전략 세우기!
대지는 이미 협소했으나 접해있는 막다른 도로 때문에 그나마 일부를 도로에 내어줘야 했다. 그 결과 실제로 건물이 땅에 닿을 수 있는 면적은 22.7m2(6.8평)에 불과했다. 이렇게 작은 바닥면적 위에서 어떻게 여유롭고 풍요한 생활을 가능하게 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은 설계 과정 내내 결정적인 동력이 되었고, 몇 가지 주요한 전략을 세우게 했다.
첫째, 중심을 만들다
가족들의 주생활공간으로서의 거실 겸 주방은 2층과 3층 사이 슬래브를 덜어내고 확보한 천장고 3.9m의 복층 공간으로 집 전체의 중심으로 만든다. 높은 층고를 지닌 주생활 공간은 협소한 주택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공간감을 제공하며 가족구성원간의 시각적, 청각적 연계를 북돋는다.
둘째, 서비스 공간을 집약하다
대지의 북쪽에 확보한 폭 90cm 켜 안에 계단, 화장실, 욕실, 파우더룸, 다용도실 등 서비스 공간들을 집약 배치해 층별 생활공간의 부피를 최대한으로 확보했다.
그 결과 최대 5.0x3.5m의 열린 바닥 면적을 확보했고 이는 일반적인 아파트의 거실 크기와 비견할 수 있다.
셋째, 외부과 경계를 허물다
법적인 제한의 결과로 파생한 자투리 공간을 외부 공간과 엮어 설계함으로써 실제 면적보다 길고 넓게 쓰이도록 했다. 주차장으로 인해 제한적일 수 밖에 없는 1층 현관홀은 폴딩 도어를 설치해 1층 필로티 공간을 내부의 확장 개념으로 쓰도록 하고, 도로와 대지의 경계에는 목재 루버로 만든 대문을 설치하여 한 번 걸러진 개방감과 적절한 독립성을 부여했다. 한편, 일조사선에 의해 작은 조각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다락은 옥상 테라스로 이어져 남산을 향해 열린 경관을 갖는다.
작은 집, 많은 창
대지는 동쪽으로 서울타워가 보이는 후암동 남산자락 경사면에 위치한다. 대지가 닿아 있는 오르막길을 따라 40년가량 된 시멘트 볼록 단층집부터, 80년대 단독주택의 전형으로 여겨지는 콘크리트 골조와 붉은 벽돌로 지은 2층 양옥집, 그리고 최근 완공된 하얀 4층집에 이르기까지 무척 다양한 표정과 나이의 주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이러한 후암동 거리 풍경이 새롭게 놓이는 이 집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 것인가는 설계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으로 탐구됐다. 다채롭고 풍부하지만, 어딘가 정돈되지 않고 산만한 거리의 인상에 이제까지 없던 규준을 제시하는 얼굴을 지닌 건물이 될 수 없을까.
마을의 모습과 닮아있다
우리가 가봤거나 알고 기억하는 아름다운 마을들은 그 마을을 이루는 건축물들이 서로 닮아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북촌의 지형을 따라 자리 잡은 도시형 한옥의 모습이 그렇고, 암스테르담 운하 곁에 일렬로 늘어선 가로형 주책들이 그렇다. 이런 마을의 구성요소가 되는 건축물들은 서로 공유하는 ‘공통분모 (Common Denominators)’를 갖는다. 건물의 비슷한 높이와 재료, 창의 크기 등 달리 말하면 평범한 재료와 유사한 건축요소가 다시 쓰이고 다르게 쓰여 어울림이 특별한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다.
친절한 인상
후암동 주택의 입면은 앞으로 집과 동네가 맞이할 긴 시간을 지혜롭게 통과하는 규준점이도록 설계되었다. 주변 건물에서 보편적으로 쓰인 벽돌(타일)로 외벽을 두르고, 각 층마다 좁고 높은 창이 세 개씩 위치한다. 이 중 하나는 창의 리듬을 만들기 위한 무늬창이며, 나머지 두 창은 내부 공간의 성격에 따라 다른 깊이를 지닌다. 다섯 개층으로 구성된 건물은 하층, 중층, 상층부로 나뉘어 각각 다른 재료를 입고 집 앞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친절한 인상을 주고 있다.
후암동 주택으로 인해 이 거리가 좀 더 아름다운 풍경이 되기를, 앞으로 새로 지어지거나 고쳐지어질 주변의 집들이 이 집을 거울삼아 비추어보고 스스로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고 바란다.
*사진작가 : 이충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