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프리랜스 에디터 박선아입니다. 매거진에서 에디터로 일하다가 지금은 프리랜서로 아트디렉팅이나 원고를 기고하며 지냅니다. 최근에는 <어라운드> 매거진에서 3년간 연재한 글을 모아 『20킬로그램의 삶』이라는 수필집을 출간했어요.
책을 내고 ‘20킬로그램의 삶’이 무엇을 의미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거든요. 여러 의미가 복합적으로 담긴 말인데 간단히 말하면 “내 모든 짐을 20킬로그램의 가방 안에 담고 싶다.”예요. 20대에 제가 살았던 집들은 ‘임시거처’였거든요. 1년 혹은 2년씩 계약하고 그 후에는 이동해야 하는 집들이었죠. 그렇다 보니 언젠가부터 짐을 잘 늘리지 않게 되었어요.
미니멀리즘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느껴지고 그냥 거추장스러운 것을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외출할 때도 가방 들고 나가길 귀찮아하거든요. 책과 핸드폰 지갑 정도만 들고 나가요. 많이 걷고 이동하는 편이라 짐이 많으면 괴롭거든요.
집에 대한 마음도 외출할 때와 비슷합니다. 가진 게 많아질수록 번거롭더라고요. 아직 ‘내 집 마련’에 대한 계획이 없어서 앞으로도 이사를 다니며 살아야 할 것 같아요. 그때마다 무겁지 않게 있던 자리를 떠나고 싶다는 바람이 있습니다.
내 집을 갖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집을 살 돈이 없기도 하지만, 사실 이사 다니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거든요. 서울에서는 전농동, 월계동, 안암동, 공덕동, 도화동, 상수동에 살아봤어요. 아일랜드라는 나라에서 산 적도 있고요. 어떤 동네에 1~2년 살고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기분이 재미있습니다. 곳곳에 추억을 쌓아두는 것도 즐겁고요.
만약 언젠가 제집을 갖게 되면 그건 작은 오두막이었으면 해요. 상상하던 집을 어느 사진집에서 보고 찢어뒀거든요. 회사나 집 한쪽에 붙여두고 그 집을 그리곤 합니다. 설사 평생 살아보지 못할 집이라고 해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럽더라고요.
오늘 소개할 집은 제가 서울에서 구한 여섯 번째 집이에요. 적잖은 이사를 하고 부동산을 드나들며 나름대로 ‘집’을 구하고 채우는 기준이 생긴 것 같아요.
7평짜리 원룸이라 사진으론 뭔가 꽉 차 보일 수도 있는데, 사실 있는 것이 몇 개 없어요. 서울의 자취방들은 ‘옵션’을 갖추고 있는 곳들이 많잖아요. 일단 그것들을 먼저 살피는 것 같아요. 옵션이 있으면 일단 제 소유 물건이 반으로 줄거든요. 집을 구한 후에도 되도록 가구는 잘 사지 않고, 접이식이나 임시로 사용하는 물건들을 사는 편이에요.
언젠가 제집이 생기면 손이 두툼한 목수가 만든 좋은 가구를 사고 싶어요. 하지만 아직까지 살았던 집들에서는 ‘언젠가 떠날 집’이라는 느낌을 갖고 있어요. 그런 기분이 있는 이상 계속 가구 같은 큰 짐은 사지 않고, 준비할 수 있는 최소한의 물건에 의지해서 지낼 것 같아요.
침대도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는 프레임이 있었거든요. 언젠가부터 프레임은 버리고 매트리스만 갖고 다녀요.
침대 프레임이 은근 이사 다닐 때, 불편하고 원룸에서는 공간도 많이 차지하더라고요.
테이블도 되도록 사고 싶지 않았는데, 친구들이 둘 이상 오면 식사할 자리가 없더라고요.
여행 가방 같은 것을 깔고 밥을 먹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하나 마련했어요.
상판과 다리가 분리되어 이동이 쉽고 저렴한 제품이죠.
옥상이 있는데 거기로 쉽게 갖고 올라갈 수 있잖아요. 친구들을 초대해서 밥이나 술을 마시려고 일부러 이걸 샀어요. 다리는 이케아 것이고 상판은 마켓비에서 원하는 크기로 주문했어요.
두 가지를 합쳐서 14만 원이었던 거 같아요. 언젠가 이사할 때, 누구에게 줘버려도 아깝지 않을 가격이죠.
언젠가부터 집을 보러 다닐 때, 옥상이나 베란다가 있으면 더 마음이 가더라고요. 있어도 없어도 그만인 공간처럼 보이지만 그런 곳이 있고 없을 때, 삶의 질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아요. 지금 사는 집을 보러 왔을 때, 방은 예상했던 대로 좁았지만 옥상을 보고 마음을 뺏겼어요. 같은 건물의 원룸 세입자들이 공용으로 쓰는 공간이지만, 어쨌든 올라갈 수 있는 옥상이 있어 기쁩니다.
가계부를 쓰는데 외식 비용으로 상당한 돈이 나간다는 걸 알았어요. 전 프리랜서고 고정적인 수입이 없어서 늘 통장 잔고를 생각하며 지내거든요. 돈을 펑펑 쓰며 노는 즐거움보다 아껴서 잘 놀았을 때, 더 즐겁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기 시작했어요. 외식할 돈으로 장을 봐서 음식을 하면 식탁이 훨씬 풍성해지거든요. 처음엔 돈을 아껴보자는 앙큼한 의도였는데, 점점 집이라는 공간에서 누군가와 둘러앉는 기분을 좋아하게 되네요.
집에서 먹으려면 요리를 준비해야 하잖아요. 친구들이 도착하기 전에 그들을 위해 요리하는 과정이 참 좋아요. 제가 점점 마트의 식재료 가격 같은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도 신기합니다.
회사에 다니고 일이 너무 바쁠 때는 돈을 쓸 시간이 없었어요. 통장에 잔고는 쌓여가고 그 돈은 야근하고 집에 갈 때, 택시비나 샌드위치와 배달 음식을 시켜먹는 데에 주로 쓰였죠. 한 달에 한 번 비싼 옷도 사고 좋은 레스토랑도 갔어요. 매일 집 앞에 택배박스를 갖고 들어가 뜯어보는 게 밤의 낙이었죠. 그땐 그 나름의 즐거움이 있었는데, 요즘 느끼는 기분도 이 나름대로 즐거워요. 좀 궁상맞은 것 같긴 하지만 서도(웃음).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아니라 나와 내 친구들이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는 일도 즐거워요. 언젠가부터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음악, 영화, 책 같은 것들은 정식으로 구매하려고 애써요. 음반으로, 영화관에서, 서점에서 사서 즐기는 편입니다.
그렇게 하나둘씩 사 모은 음반을 친구들과 나눠 들으면 좋아요. 어떤 노래 하나에 긴 이야기가 이어지기도 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나누지 못하는 얘기들을 하기도 하죠. 이렇게 좁은 방에 둘러앉아 놀면 함께하는 시간의 밀도가 더 촘촘해지는 것 같아요.
친구들을 초대해서 논다고는 하지만 사실 친구들이 오는 날은 가끔이고 대부분의 날은 고양이와 둘이 보냅니다. 몸이 약해 엄마가 버리고 간 새끼 고양이를 누군가 구조했고, 여러 집을 거치고도 갈 곳이 없어 제게 왔습니다. 같이 산 지는 2년 반 정도 되었는데, 이 친구를 통해 몰랐던 걸 많이 알아가요.
저는 밖에 나가고 사회생활도 하지만 저희 고양이에겐 이 집이 세상 전부라 생각하면 가끔 막막해져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 거로 생각하다가도 어떤 날에는 너무 미안해서 막 울어요.
제가 언젠가 넓은 집에 살고 있다면 그건 제 의지보다는 사랑하는 누군가를 위한 일일 거예요. 고양이가 더 넓은 마당에서 뛰어 놀게 하기 위해서 혹은 제 아이가 혼자 책을 읽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런 일이 아니고 저만 생각한다면 저는 계속 이 정도 크기의 집에서 살고 싶고요.
자질구레한 작은 물건이 곳곳에 있는데 그건 대부분 친구가 준 거예요. 아무리 짐을 줄이고 싶어도 선물을 버릴 순 없더라고요.
편지는 부엌에 붙여두고 외로우면 뒤집어 보고,
작은 선물들은 책꽂이 위에 올려두고 가끔 먼지를 털어줍니다.
20대에는 옷 욕심이 엄청났습니다. 무척 사고 버렸죠. 요즘은 1년에 몇 벌 사지 않는데 한 번 살 때 좋은 옷을 사요. 그런 일을 반복하다가 언젠가는 피부처럼 잘 어울리는 옷 서너 벌만 남기고 싶네요. 예전에는 행거 네 칸으로도 부족했는데, 지금은 두 칸에 들어가요. 흐뭇합니다.
옷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것들에 대해 그런 마음이 커지는 듯 해요.
줄일 수 없는 욕심이 하나 있는데, 그건 책이에요.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늘 주변에 책이 있었습니다.
대학생 때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기에 집에 책이 많진 않았어요. 서점에 가서 쭈그리고 앉아 읽기도 했고요. 책값이 비싸다고 느껴서 좋아하지만 사지는 않고 빌려 읽는 식이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치킨이랑 피자는 잘 사 먹었거든요. 치킨 한 마리랑 책 한 권이랑 가격이 비슷한데 어째 책값만 아까워했던 거 같아 부끄럽네요.
졸업하고 출판업계에 종사하고 나서는 의무감으로라도 책은 사 봅니다. 앞서 말했지만, 영화, 음악, 연극 같은 예술 장르 앞에서도 같은 마음입니다.
극단적으로 ‘오늘 이걸 정직하게 돈을 내고 사지 않으면 내일부턴 못 본다.’고 생각해요. 내일부터 음악이 없고, 영화가 없고, 책이 없고, 그림이 없고, 사진이 없는 세상에 살게 된다고 생각하면 마음가짐이 달라지더라고요.
책을 사서 읽고 쌓아두다가 너무 많이 쌓이면 주변에 선물하거나 헌책방에 팔아요. 아름다운 가게에도 종종 보내고요.
책도 언젠가는 정말 좋아하는 몇 권만 남기고 싶은데, 아직은 잘 안 되네요.
원래는 책을 바닥에 쌓아놓았었거든요. 그런데 이 집에 입주할 때, 이전 세입자가 책꽂이를 버리고 가서 처음으로 책꽂이를 써보고 있습니다.
처음엔 창가에 놓고 사용하다가 지금은 방 가운데를 가르는 벽처럼 쓰고 있어요.
좁은 방이지만 이 책꽂이 덕분에 침실과 거실이 나름대로 분리되어 만족스럽습니다.
20대를 꽤 부지런하게 살아왔어요. 주말 없이 일만 한 적도 있고, 쉴 틈 없이 늘 뭔가를 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도 늘 이것저것을 하고 있고, 앞으로도 제게 오는 일에 성실하게 임할 겁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돈을 벌 수 있을 거고, 어쩌면 지금보다 사치스런 삶을 살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날을 생각하면 배가 부른데, 그런 날이 오더라도 그것 덕분에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뭐가 있든 없든 건강하게 잘 지낼 방법을 알고 싶어요. 아직 잘 모르지만, 어제 몰랐던 것은 오늘 알고 오늘 모르는 건 내일로 미뤄두려고요.
곧 또 이사하겠죠. 여긴 제집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이사도 하고, 여러 사람을 집에 초대하고 또 혼자가 되기를 반복하면서 언젠가는 ‘작은 집에서, 넓은 사람과, 깊은 마음’으로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