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의 물리적 거리 428km”
날이 적당한 5월의 어느 날,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었다. 설레는 마음을 가지고 부산으로 향했다. 오래된 주택가, 골목 끝에서 홀로 하얗게 빛나고 있는 건물을 만날 수 있었다. 모서리를 잘라낸 듯한 삼각형 모양의 입구로 들어서니 흰색의 외관과는 상반되는 느낌의 계단이 펼쳐졌다.
골목 끝에서부터 보이는 하얀 집
안녕하세요. 로스트펭귄의 관리자 조수인입니다. 어릴 적부터 제게 공간이 주는 의미는 남달랐던 것 같아요. 아름다운 공간에 있으면 일의 능률이 더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평생을 아파트에서 살았던 제게 주택의 삶은 로망에 가까운 것이었어요. 주택은 보안에 취약하고 살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파트를 선호하시곤 하는데, 그런 단점을 보완한 주택을 지어보고 싶었어요.
땅을 보러 다닌 시간부터 완공까지 3년-
다들 부산하면 해운대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저는 해운대 보다 광안리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고등학교 졸업 이후 계속 타지에서 살다가,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왔을 때, 친구도 없고 심심하던 차에 이것저것 취미생활을 확장시키기 시작했어요. 그 중에 하나가 땅 보러 다니기 였는데.. 출근을 하지 않는 토요일마다 부동산에 기웃거리며 오래되고 낡은 주택매매가를 알아보고 다녔어요.
그때는 그냥 시세나 알아보자 하는 심산이었는데, 마침 마음에 드는 자리를 발견하게 되었고, 또 때 마침 건축과 교수로 부임한 초등학교 동창 친구와 손을 잡고 일을 벌여 보기로 했죠.
땅을 보러 발 품 판 시간이 1년, 설계 1년, 건물 짓는데 10개월, 셀프인테리어 2개월 정도 해서 총 3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어요.
타향생활을 10년 남짓 했고, 그 중 유럽에서 5년 정도 살았는데 다양한 형태의 집에 살아보니 오히려 제 취향이 명확해졌어요. 여행을 다닐 때에도 작지만 독특하게 꾸며놓은 부티크호텔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B&B(Bed&Breakfast)를 찾아 다녔어요. 주인이 세심하게 꾸며놓은 공간을 자꾸 보다 보면 어느새 감각도 함께 느는 것 같더라구요.
내가 가진 취향의 집합체
건물은 하나지만 개별 공간마다 독립된 출입구를 가지고 있어요. 이 계단은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에요.
모든 계단이 건물을 감싸고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나누고, 독립된 출입구를 만들기 위해 나온 계단 디자인이죠.
내벽은 새하얀 건물의 외벽과는 상반된 느낌이에요. 외벽을 하얗게 하기 위해 단열재를 겉면에 시공했기 때문에 오히려 내벽에는 콘크리트의 온전한 느낌을 살릴 수 있었어요.
아늑함과 모던함이 가득한 공간
처음 설계 때부터 제가 지낼 공간으로 설계한 공간이에요. 건축법에 따라서 설계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비스듬한 벽면으로 만들어졌어요.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아늑한 느낌이 더욱 배가 되었죠.
4층은 대략 14평 정도에요. 평수에 비해 주방을 넓게 계획했어요. 벽과 바닥이 같은 톤이라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구요. 그레이톤의 벽과 바닥, 그리고 대리석까지 더해져 자칫 차갑게 느껴질 것 같아서 조명을 최대한 따뜻한 느낌이 들도록 신경썼어요.
예전에는 정말 맥시멀리스트였어요. 물론 지금도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ㅎㅎ 벽면이 기울어져 있어, 수납이 힘든 구조다 보니 이사를 오면서 정말 많이 버렸어요. 미니멈리치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양질의 물건을 조금만 갖고 살아가는 것, 이대로만 간다면 가능할 것 같아요.
인테리어에서도 최소한의 것들만..! 멋 부리지 않은 것이 오히려 멋있을 때가 있더라구요.
사람도 그렇고 집도 그런 것 같아요. 예전에는 예쁜 옷, 비싼 가방, 좋은 신발 이런 것들이 좋았는데, 지금은 그냥 편한 옷에.. 에코백.. 삼선슬리퍼로도 잘 다니고 있어요. 마찬가지로 집에도 꼭 필요한 가구들만 놓고, 없으면 없는 대로 지내보니 익숙해지더라구요.
바닥과 비스듬한 벽이 만든 공간
일본의 협소주택이나 좁은 다락방같은 아늑함을 좋아해요. 비스듬한 벽 덕분에 동굴같은 느낌이 드는 침실 공간이에요. 저는 왠지 넓은 곳에서 잠이 잘 안 오더라구요.
침대에 기어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그 느낌이 되게 좋아서 잠이 더 잘 오는 침대 맞춤형 공간이에요. 마침 매트리스랑 사이즈도 딱 맞구요ㅎㅎ 사선으로 난 창문 덕분에 누워서 하늘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특히, 비오는 날!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분위기는 누워 본 사람만이 알겠죠?ㅎㅎ
그레이와 골드가 조화로운
침실 옆으로 있는 화장실이에요. 화장실도 벽과 바닥 모두 그레이톤이기 때문에 따뜻함을 더해주고 싶었어요. 골드 악세사리로 포인트를 주고 싶어서 마음에 드는 제품을 찾아 해외사이트까지 샅샅이 살폈어요.
쇼핑에 있어서는 신중한 성격이라서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 결제하기 전까지 보고 또 보고, 어느 것 하나 대충 구입한 것이 없어요.
고생한 만큼 예쁘게 잘 나왔지만, 사실 사용하는데 조금 불편함이 있긴해요. 제 눈에만 보이는 잘못 시공 된 부분들도 신경 쓰이고... 다시 짓는다면 정말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원형 계단을 따라 햇살이 가득한 다락방
건물이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이기 때문에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원형 계단 밖에 답이 없더라구요.
한 가운데 위치한 원형 계단으로 올라가면..
원형 계단의 끝은..
원형 계단의 끝이 이런 다락방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라며...ㅎㅎ
많은 사람들이 다락방에 대한 로망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아요. 뾰족한 지붕의 다락공간은 저와 제 친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에요.
광안대교 쪽으로 크게 나있는 ㄱ자 창문을 통해서 아침 8시면 햇빛이 깊숙이 들어오기 때문에 강제로 기상할 수 있어요.
늦잠을 자고 싶어도 일어나게 될 거에요. 하지만 눈을 뜨면 맞이하는 아름다운 하늘 덕분에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합니다.
사방으로 각기 다른 형태의 창이 나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햇빛을 느낄 수 있어요.
이제 곧 완연한 여름이니, 지금의 배치와 반대로 바꿀까해요. 아무래도 블라인드도 없는 창문 아래에서 자다 보면 몸이 익어버릴 수 있으니..ㅎㅎ
‘My cave’
‘Man cave’라는 말이 있더라구요. ‘Man(남자)’과 ‘Cave(동굴)’의 합성어로 말 그대로 ‘남자의 동굴’이라는 뜻인데, 남자들의 취향이 집약된 공간을 말하는 단어래요. 이 공간은 제 취향이 집약된 공간이에요. 이를테면, My cave 또는 Suin’s cave 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공간에서는 경사 진 벽면의 문제로 수납이 해결되지 않다보니 모든 물건들은 3층에 두었어요. 아담한 공간을 좋아하기 때문에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 않아요. 이 공간에서도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기에 불편한 점이 전혀 없답니다.
구 맥시멀리스트의 짐 줄이기
다만 한 가지-! 줄이고 줄인 게 이 정도인데.. 조금 더 줄여야..겠죠...?
회사에서는 잘하는 일을 하고, 퇴근 후에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렇게 삶의 밸런스를 잡아가며 살자고.
하고 싶었던 게 워낙 많았던 지라 바쁜 시간을 쪼개가며 이것저것 배웠던 것들이 제 삶을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아요. 도예, 실크스크린, 목공, 재봉, 자수, 독립출판 등등 ㅎㅎ
그러면서 만나게 된 열정 많은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들이 많아요. 그 사람들이 제겐 가장 큰 재산이구요.
포인트 컬러로 산뜻하게 꾸민 임대공간
마지막으로 소개할 공간은 2층과 3층의 복층공간이에요. 이곳은 임대를 위한 공간이에요. 공간마다 느낌이 전부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면 따뜻함을 품고 있다는 점이에요.
그 중에서도 이 공간이 가장 따뜻한 공간인 것 같네요. 흰색을 좋아하는데, 작은 공간을 하얗게 꾸미면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어서 좋아요. 천장을 둘러 간접조명을 설치해서 구석구석 밝혀주고 있어요.
발판을 하나씩 벽에 고정시킨 오픈형 계단이 있어요. 흰 벽에 한 칸씩 떠 있는 나무계단이 포인트에요.
나무계단을 따라 올라오면 침대 2개가 나란히 있어요. 아래 층은 주방과 거실, 위 층은 침실로 자연스럽게 공간을 분리했어요.
창틀이나 커튼은 웜그레이톤으로 맞추고, 가구나 액자 같은 소품으로 따뜻한 색감을 더해주었어요.
다시 내려와서 주방과 화장실을 간단히 보여드릴게요.
꼭 필요한 것들만 있는 一자 주방이에요.
화장실도 심플하게-! 완벽하게 화이트와 그레이로만 이루어진 공간이에요.
마지막으로 ‘로스트펭귄’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시는지...
직장생활을 12년간 하며, 무언가 더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늘 궁리하던 습관이 지금의 저와 이 공간을 만든 것 같아요. 작년 12월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둘 때엔 꽤 큰 결심이 필요했는데, 조금 덜 벌어도 더 행복하자는 생각으로 사직서를 제출하게 된 것이 제 인생의 큰 터닝포인트가 된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 지금의 건축가 친구와 장난스레 나누던 이야기가 어느덧 현실이 되었어요. 처음 건물을 짓기로 결심하고, 땅을 알아보고, 계약을 하고, 설계가 완성되고, 시공업체를 검토하던 매 순간에도 내가 과연 잘 하는 걸까? 계속 고민했어요. 원래 일을 좀 저지르는 스타일이긴 한데, 이건 좀.. 그동안 저질렀던 일들과는 스케일이 다른지라... 그리고 경험 해보지 않았던 일이기에 두려움이 컸지만 사실 저는 ‘답정너’였던 것 같아요(웃음)
매 순간을 후회하기도 했고, 누가 주택을 짓고 싶다고 하면 그냥 아파트에 살라며 말리기도 해요. 정말 쉬운 것이 하나도 없었고, 예상치 못한 곳에서 끊임없이 변수가 발생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이 있다면 제가 만든 공간에서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예요.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면 우선은 저지르라고 얘기를 해요.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이라면 일단 첫 걸음을 내딛고 나면 어떻게든 끝이 있다고..
제가 최근 저지른 일은, 1년 동안 비워 두었던 2층 작업실 공간을 카페로 오픈 준비중이예요. 늘 해보고 싶었던 일이 카페 운영이었는데, 잘 할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걸어가 보자고 생각했어요. 디테일 하나까지 챙기려다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사실.. 그래서 언제 오픈하게 될 지 미지수지만 ㅎㅎ 이번 여름이 끝나기 전에는 오픈할 거예요.
제게 작은 꿈이 있다면.. 언젠가 로스트펭귄의 두번째, 세번째 건물을 짓고 싶어요. 건물의 느낌은 통일하되, 스케일과 설계는 완전히 달리해서 제가 좋아하는 도시에 하나씩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실 그런 식의 컨설팅의뢰가 있었는데 여러가지 문제로 아직 진행된 것은 없어요.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 꼭 실현되었으면 좋겠어요.
이름은 로스트펭귄(길 잃은 펭귄)이지만, 이를 통해서 수인님 만큼은 잃어버렸던 자신을 찾은 것 같았다. 현실적인 제약만 없다면 하고 싶은 것이 정말 많다고 이야기하는 수인님의 모습에 언젠가 꼭 로스트펭귄을 서울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밤이 되었고, 로스트펭귄은 골목 끝을 홀로 밝히고 있었다.
건축디자인 : 김병찬
010-9276-7387
설계 : (주)에이도스 건축사 사무소
051-758-6723
시공사 : 채헌건축
055-282-61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