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은 하루 대부분을 사무실, 정확히는 한 평도 되지 않는 책상 앞에서 보낸다. 일하는 공간을 ‘집’이라 부르진 않지만,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셈하다 보면 얼추 집에 가까운 곳이란 걸 알게 된다. 집과 사무실을 공평하게 대하는 이들이 있을까? 일러스트레이터 곽명주는 8평 남짓의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그녀를 찾아가 ‘일하는 공간을 꾸리는 마음’에 관해 물었다.
지금의 작업실 얻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전의 작업실은 경복궁 근처에 있었어요. 1.5평 정도의 작은 공간이었죠. 큰 작업을 하기엔 너무 좁더라고요. 더 넓은 공간을 얻어 취향에 맞게 꾸미고 싶기도 했고요. 그래서 집 근처인 연희동에 조금 더 큰 8평짜리 작업실을 얻게 되었어요. 여전히 좁긴 하지만 전보다는 많이 넓어졌죠.
처음 공사를 시작할 때, 내부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지금 공간과는 다른 모습이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처음 왔을 땐, 정말 최악이었어요. 유리가게여서 바닥에 산업용 고무판이 다 깔려있었거든요. 그런데도 이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제 공간이 그려졌어요. 유리가게의 물건들이 모두 사라지고 제 공간이 된 모습이 보이는 듯했죠. ‘여기다!’라는 느낌이 왔어요.
인테리어는 바꾸면 되잖아요. 내부 상태보다는 아치형 입구라던가 안쪽에서 보이는 바깥 풍경 같은 것이 중요했어요.
바깥 풍경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창밖으로 잎이 많은 나무가 보였거든요. 내부 공사하기에 최악의 상태라 아주 조금 후회하긴 했지만, 견딜만한 후회였어요. 여전히 이 공간을 얻길 잘했다고 생각하고요.
최악의 상태였으면 내부 공사도 힘들었겠어요.
거창하게 말했지만 사실 기본적인 공사만 했어요. 유리가게 물건들을 빼고 버린 후에는 대부분 고치진 않았어요. 가장 많이 손이 갔던 곳은 부엌이에요. 텍스쳐 온 텍스쳐(texture on texture)라는 업체에 공간을 보여주고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워낙 잘하는 분들인 걸 알고 있어서 믿고 부탁했죠.
여러 자료를 들고 와서 보여주면서 벽을 나무로 하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궁금했어요. ‘벽을 나무로 붙이면 어떻게 되려나?’ 생각하다가 “해보자!”하고 시작했죠. 업체분들과 같이 나무를 보러 가서 고목재를 사와서 붙였어요.
고목재란 오래된 나무를 뜻하는 건가요?
부엌에 쓰인 목재를 잘 보시면 빈티지한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가공한 것이 아니라 이곳에 처음 올 때부터 오래된 느낌이 나는 목재였거든요. 그걸 고목재라고 불러요. 동남아시아에서 이런 걸 팔더라고요. 멀쩡하게 가공된 것이 아니라 오래된 나무를 사는 거예요. 낡았으니 쌀 것 같지만 사실 이게 더 비싸요. 시간을 견딘 값을 받는 것 같아요.
기본적으로 부엌 벽과 가구 공사를 끝낸 후에는 주변 친구들을 총동원해서 싱크대나 레일 같은 나머지 공사를 했죠. 이케아에서 대부분을 사와서 만들었어요.
예쁜 공간이지만,
완벽하게 맞춰 만든 공간은 아닌 것 같네요.
제가 까다롭지가 못해요. 스위치 중의 하나는 켜지고 하나는 안 켜지거든요. 전기 연결이 잘못되어서 그런 건데 이런 실수가 크게 신경 쓰이지 않더라고요. 그냥 그렇게 두고 잘 쓰고 있어요.
부엌의 나무가 고목재라 빈티지한 느낌이 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다른 가구들도 비슷해요. 맞춰서 고목재로 만든 것을 산 건가요?
사실 거의 다 주워온 거예요. 돈을 주고 산 가치 있는 가구는 책상밖에 없어요.
왜 책상만 샀어요?
별다른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저는 책상에서 평생 일을 할 것 같더라고요. 그림을 그리니까요. 전체 비용의 반 이상이 책상이었어요. 책상만 120만 원이 넘었었죠.
그 외 간이 의자들은 ‘마켓엠’이라는 사이트에서 샀어요.
제 눈에는 버려진 물건이 보이지 않던데,
어떻게 이런 가구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요?
길을 가다가 멀리에 뭔가 버려져 있는 것 같으면 일단 가봐요. 가서 요리조리 살펴보면서 어디에 쓸 수 있을지를 고민해요.
거울 같은 경우에는 원래 가로로 거는 액자였거든요. 가훈 같은 것을 적는 것 있잖아요. 그 프레임이 마음에 들어서 주워온 다음에 거울을 주문해 넣었어요. 그런 식으로 활용할 것들을 그려보는 거죠.
용도를 떠나서 저희 동네에는
버려진 물건들이 별로 보이지 않더라고요.
아마 이 근처가 오래된 주택가여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아요. 가게가 별로 없고요. 이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많아요. 오랫동안 사람들이 산 집이 많아서 그런지 나오는 물건들도 적당히 낡고 손때가 묻어있어요.
저는 낡은 것들을 좋아해요. 그런 물건에 정이 가죠. 동네가 번화가나 아파트 단지라면, 오래된 주택가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세요.
다 주워온 오래된 물건들이라고 했는데,
마치 계획하고 산 것처럼 서로 잘 어울리네요.
아마 소재 때문일 거예요. 제가 나무, 철, 종이를 좋아해요. 나무면 일단 다 봐요. 어디에든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러고 나서 철이나 종이를 고르면 웬만하면 잘 어울려요. 나무와 철, 종이 세 가지가 잘 어울릴 수 있는 소재거든요. 작년에는 목공 수업도 들었어요. 그때 만든 작은 의자도 한쪽에 있죠.
목공은 어떻게 배우게 되었어요?
저는 그림을 그리다 보니 모든 것을 그림과 연결해서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러다 보니 그림 빼고는 잘 모르고 사는 것 같더라고요. 그림에만 한정된 사람 같아서 다른 걸 해보고 싶어 목공을 선택했어요. 해보고 나니 목공은 잘 맞진 않는 것 같아요. 가구는 사거나 주워야지 만드는 재주는 없더라고요(웃음).
가구를 만드는 일의 어떤 점이 잘 맞지 않았어요?
뭔가를 만드는 일은 배우면 할 수는 있잖아요. 그런데 잘할 수 있는 일은 조금 다른 것 같아요. 모든 경험이 삶을 닮아있다는 생각을 종종 하거든요. 그림을 그리는 것도 사는 것과 비슷하고 가구를 만드는 일도 사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나무를 손질하는데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하더라고요. 저처럼 성질 급한 사람은 할 수가 없어요. 나무를 깎아 인형도 하나 만들고 그랬는데, 인형 하나도 제겐 쉽지가 않더라고요. 목공 선생님을 보면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겠구나, 싶더라고요. 선생님이 마치 나무 같았어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계시니까
작업실이 회사원들의 사무실 같은 역할이겠네요.
회사에 다니는 분들에겐 어떨지 모르겠지만, 제겐 집이 작업실이고 작업실이 집이에요. 그만큼 중요한 공간이죠. 하루의 많은 시간을 작업실에서 보내잖아요. 그만큼을 또 집에서도 보내게 되고요. 그래서 작업실에도 쉬는 공간을 마련해둬요. 집에서는 작업할 공간을 마련하고요.
머무는 공간은 어디가 되든 중요한 것 같아요. 아주 잠시여도요. 잠깐 가는 카페도 자신에게 맞는 곳이 있잖아요. 하물며 일하고 자는 공간은 더 중요하죠.
집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데
굳이 작업실을 얻은 이유가 있었나요?
지칠 때가 있잖아요. 한 공간에서 뭔가를 하는 게. 집에 있다 지쳐서 작업실을 만들었고 작업실에서 지치면 카페도 가요. 혼자서 일을 할 땐, 되게 차분해져요. 그럼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옮겨서 일하기도 하는데 그런 환경이 좋을 때도 있어요. 사람들이 왔다 갔다 거리는 걸 구경하기도 하고, 다들 열심히 사는구나 생각하기도 해요. 사람이 같이 있을 때의 기운이 있죠. 그림은 둘이 그릴 수가 없다 보니 혼자 하고 있지만, 그래서 더 공간을 자주 옮겨 줘요. 여행도 자주 가고요.
여행은 어떨 때 하세요?
현재 있는 곳이 지겨울 때요. 그렇게 떠나면 금세 작업실이 그리워져요. 이 공간은 그냥 ‘나’잖아요. 눈을 감아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다 알고, 동선도 그려지죠.
낯선 곳에 가면 불편하고 어색하잖아요. 그럼 어김없이 익숙한 곳이 그리워지더라고요. 친구나 가족처럼요. 외국의 남의 집을 빌려서 그림 그리고 있으면 잠시 좋기도 하지만, 이내 작업실이 보고 싶어져요. 팔 뻗으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속속들이 아는 나의 책상. 그곳에서 편안하게 그리고 싶죠. 내 풀, 화분들 보고 싶고.
그러고 보니 화분이 많네요.
사거나 선물 받은 것들이에요. 여행 갔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었거든요. 잘 돌봐줘야 하는 화분 두 개는 저희 목공선생님 댁에 있어요. 나무를 잘 다루는 분이라 화분도 잘 돌봐주시는 것 같아요.
책도 꽤 많아요.
네. 이것도 목공이란 비슷한 것 같아요. 그림에만 집중하고 싶진 않아서 책도 읽으려고 노력해요. 많이 읽는 것 같지는 않지만, 틈틈이 보려고 해요. 음악도 마찬가지고요. 좋아하는 것들로 공간이 채워져 있어요.
혹시 좋아하지 않는 물건을 억지로 들여야 할 땐, 어떡하나요? 취향에 안 맞는 물건을 선물 받거나 할 때가 있잖아요.
아, 저도 그런 경험 있어요. 작업실 오픈했다고 하면, 식물 많이 선물하잖아요. 마음에 안 드는 화분 선물이 들어올 때가 있었어요. 그러면 정말 미안하지만, 마음에 드는 화분에 분갈이했어요. 요즘은 그러지 않으려고 애써요. 나를 위해서 누군가 뭔가를 준 건데, 앞에선 “고마워!” 해놓고 제자리를 찾아주지 않는 게 너무 미안한 일이란 걸 알았거든요. 나를 위해 마음을 써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요즘 조금씩 알아가요.
작업실 근처에 자주 가는 카페가 하나 있거든요. 주인 언니와 친해졌는데 언니는 취향이 분명한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어떤 선물을 주든 그걸 잘 간직하더라고요. 가게 곳곳에 제가 볼 수 있는 곳에 두고요. 그 사람이 그걸 소중하게 두고 있는 게 너무 고마웠죠. 그래서 이젠 친구들이 준 것들을 숨기지 않아요. 잘 보이는데 두려고 해요.
작업실에서 보내는 시간 중에
가장 좋아하는 시간 있나요?
대부분 시간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건 시간이 아니라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고요. 기분 좋으면 언제든 좋고 안 좋으면 어디 있어도 힘들더라고요. 더 채우고 싶은 것도 없어요. 갖고 싶은 것도 없고요. 주워온 것들이지만, 주고 싶은 것도 없어요. 누구도 갖고 가면 안 돼요. 지금은 100% 예요. 이 공간은 저를 닮은 곳으로 더하거나 뺄 수 없는 것 같아요.